방콕은 가성비의 도시다
tips Essay bangkok

방콕은 가성비의 도시다

3분 읽기

방콕을 처음 온 건 스물셋이었다. 하루 예산은 2만원이었고, 그걸로 숙소도 자고 밥도 먹고 맥주도 마셨다. 그때의 나에게 방콕은 기적 같은 도시였다. 세상에 이런 데가 있다고. 이렇게 더운데 이렇게 싸고 이렇게 재미있다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그새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졌고, 쓰는 돈도 달라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콕에 대한 가성비 감각은 여전히 살아있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달까. 20대의 나는 2만원을 아꼈고, 지금의 나는 50만원을 아낀다.

카오산은 끝났다. 방콕은 아니다.

방콕 카오산 로드 야경 간판과 오토바이

카오산 로드는 이제 배낭여행자들의 성지가 아니다. 한 때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이 모여들던 그 특유의 에너지 — 도미토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밤새 창 맥주를 마시던 그 분위기 — 는 많이 희석됐다. 200바트였던 방이 지금은 600바트를 넘고, 옆에 앉은 사람이 여행자인지 인스타그램 콘텐츠를 찍으러 온 건지 구분이 안 된다.

그렇다고 방콕이 배낭여행자에게 불친절해진 건 아니다. 아리나 빅토리 모뉴먼트 근처, 방쑤 쪽으로만 가도 아직 로컬 물가가 살아있다. 40바트짜리 카오만까이에 15바트 탄산음료, 하룻밤 500바트짜리 에어컨 방.

방콕 아리 골목 카오만까이 현지 식당 점심

이 가격에 이 퀄리티를, 이 정도 즐길 거리와 먹을 거리와 함께 제공하는 도시는 방콕 말고 없다. 물론 단지 싸게 살기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지금의 태국은 10년 전의 태국이 아니다. 치앙마이도 올랐고, 방콕도 올랐다. 하지만 먹는 것 수준, 교통, 안전, 즐길 거리까지 복합적으로 따졌을 때 — 방콕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가성비 인프라를 가진 도시라고 생각한다.

럭셔리 여행자에게도 방콕이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다.

돈이 썩어나게 많아서 금전감각이 어딘가 고장난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하다. 어디서나 비싸고 어디서나 좋으니까. 그런데 럭셔리를 한번 제대로 누려보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특히 한국 기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태국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추천한다.

왜? 한국의 럭셔리는 주거와 차량에 집중되어 있다. 강남에 사는 것, 수입차를 모는 것. 그런데 서비스, 식문화, 즐길 거리에 있어서는 — 특히 일상적으로 손이 닿는 수준의 럭셔리에서는 — 아직도 태국이 한국보다 앞선다고 생각한다. 접근 가능한 작은 럭셔리. 이것만큼은 태국이 최고라고 자부한다.

어느 방콕의 하루

내가 좋아하는 방콕의 하루를 그려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5성급 호텔이다. 1박에 20만원 초중반. 짜오프라야 강이 보이는 리버뷰 방. 쉐라톤 엔트리룸 얘기가 아니다. 제대로 된 화이트 시트에, 들어서면 기분이 달라지는 그 공간이다.

방콕 짜오프라야 강변 5성급 호텔 리버뷰 객실 창문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수영장으로 내려간다. 직원이 타월을 건네준다. 자리를 잡고 땡모반 한 잔을 시킨다. 150바트다. 수영을 하고 선베드에 눕는다. 어제 태국 친구들과 클럽에서 너무 신나게 마셔댔는지 아직 술이 안 깼다. 낮잠을 잔다. 한낮의 태양을 피하는 건 덤이다.

방콕 5성급 호텔 야외 수영장 선베드와 수박주스

오후 3시가 넘어 느즈막히 눈을 뜨면 배가 고프다. 미리 봐둔 스파로 향한다. 골목 아줌마들이 운영하는 곳이 아니다. 인테리어도 예쁘고, 테라피스트도 제대로 훈련받은 곳. 1시간 타이마사지에 1500바트다. 6만원이다. 서울에서 이 퀄리티 마사지를 받으려면 얼마를 내야 할까.

방콕 고급 스파 마사지룸 조명과 흰 시트

저녁은 미슐랭 1스타다. 예약을 해뒀다. 코스로 먹으면 인당 3000~4000바트, 12만원~16만원 선이다. 같은 수준의 식사를 한국에서 즐기려면 두 배를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음식은 여기가 더 낫다. 태국 식재료의 신선함이 기본으로 깔리니까.

방콕 미슐랭 레스토랑 저녁 코스 테이블 세팅

식사를 마치고 한 군데만 더 간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곳, 포시즌스 호텔 안에 있는 방콕 소셜 클럽이다. 루프탑의 화려함 같은 건 없다. 그냥 아름다운 공간 안에서 칵테일 한 잔. 시그니처 칵테일에 핑거푸드 하나를 주문하면 600~800바트, 2만원 조금 넘는다. 한국이라면 대체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

포시즌스 방콕 소셜클럽 칵테일 바 인테리어

2만원을 아끼느냐, 50만원을 아끼느냐

20대 초반의 나에게 방콕은 하루 2만원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즐거운 여행지였다. 너무나 행복한 추억이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방콕의 가성비는 다른 의미다. 하루 2만원으로 버티는 것보다, 한국이라면 100만원을 써야 즐길 수 있는 하루를 절반 가격에 누릴 수 있다는 것. 2만원을 아끼느냐, 50만원을 아끼느냐의 차이달까.

물론 50만원을 아예 안 쓰는 게 제일 아끼는 방법이긴 하지만.

#essay · #bangkok · #lifestyle · #가성비 · #럭셔리
공유

관련 글